서현진의 평범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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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브리스 톱 에이치앤엠(H&M).

건강하고 상식적인 세계가 그립다. 평화롭고 일상적인 삶을 지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지는 세상을 버티고 살아내야 하는 고단함이 그렇게 만들었다.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 탓인지 드라마가 밍밍하고 지루해진 지도 꽤 됐다. 웬만하면 안 본다. 재미없어서 못 보겠다. 그러다 문득 <식샤를 합시다 2>(이하 <식샤>)를 챙겨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먹방의 드라마 버전인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판타지다.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살아가는 드라마 속 사람들은 평범한 밥 한 끼로 위로받고, 화해하고, 가까워진다. 부자가 아닌데도 잘 산다. 평균치의 삶에서 누락되지 않기 위해 삭막함과 외로움을 견디며 사는 대신 어울려 산다. 아픈 현실이 만든 판타지다.

그러다 서현진을 발견했다. 그전까지 서현진은 사극에서 몇 번 본 게 다였고,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은 몰랐다. 촌스럽고, 주책없고, 가난한 대식가인 ‘백수지’는 자칫 비현실적인 코믹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얼굴 예쁘고 대사를 책처럼 읽는 배우가 연기했다면 그랬을 거다. 서현진은 세련된 맛이라고는 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백수지를 어딘가 진짜 살고 있는 것 같은 여자로 만들었다. 서현진은 백수지랑 곱창 좋아하는 건 닮았지만, 여행에서 만난 아이슬란드의 대지를 누가 할퀸 것 같은 땅이라고 묘사하는 여행자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아 아껴 읽는 독서가라는 건 다르다. 그리고 그녀는 현장의 사람들과 맺는 살가운 관계가 어떻게 자신을 풍성하게 해주는지 아는 배우다. 가까이에 있는데 알아보지 못했던 그녀와 만나서 기쁘다. 그리고 나는 하정우의 먹방보다 서현진의 먹방이 더 좋다. 혼자 먹는 밥보다는 같이 먹는 밥이 더 맛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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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한 아이보리 티셔츠 그레이 양(Grey Yang), 레이스 쇼츠 조셉(Joseph).

화보 촬영이 어색한가보다. 더 씩씩하고 밝을 줄 알았다. 재미있게 찍는다고 찍었는데 내가 어색해해서 힘들었겠다.(웃음) 낯을 좀 가린다. 그래도 한 번 보는 거랑, 두 번 보는 게 다르다. 다음번엔 더 나을 거다.

드라마가 성공했다. 시즌 1이 먹방 드라마였다면, 시즌 2는 관계에 관한 얘기다. 촬영 현장 분위기가 그대로 간 것 같다. 이런 현장이 없을 거라고 느꼈다. 종방연 때 은지(조은지) 언니가 서른 편이 넘게 작품을 했는데 이런 현장이 없었다고 하더라. 아주 특별했다. 마지막 3주까지는 일주일에 네 차례 촬영했고, 한 번도 새벽 2시를 넘긴 적도 없고, 그러니까 다 컨디션이 좋고, 웃는 얼굴로 만나고, 콘티도 완벽했다. 사실 드라마는 그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 이번엔 기분 좋게 가서 연기만 잘하면 됐다. 체력적으로 부침이 없었고. 감독님들도 기분 좋게 일하는 걸 중시했다. 끝나고 왜 그렇게 좋았을까 생각해보니 함께 한 사람들이 전부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다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고, 그게 느껴져서 즐겁게 했다.

캐스팅을 보고 좀 의아했다. 왜 서현진이지? 사실 원래 성격이 훨씬 활발하고 우악스러워서 나는 위화감이 없는데, 보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다. 워낙 입 다물고 있으면 얌전해 보인다고도 하고, 그동안 맡은 역할들도 그렇고. 작가님의 의견이었다고 들었다. <제왕의 딸, 수백향>(이하 <수백향>)을 재미있게 보셨다더라.

백수지는 전형성이 강한 캐릭터다. 동그란 뿔테 안경 쓰고 히키코모리 기질도 있어 보이는 가난한 작가. 작위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백수지랑 금방 친해졌다. 캐릭터에 인간미를 입히는 건 배우다. 서현진의 백수지는 어떤 사람인가? 일단 사람들이 ‘아, 진짜 쟤 때문에 못 살아’ 하길 바랐다. 그 애 때문에 창피하지만 밉지는 않은 애. 푼수여서. 그런데 같이 있으면 볼륨 조절 안 되는 사람. 본인은 모른다. 내가 좀 그렇다. 그런데 백수지가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 간의 거리를 잘 못 재는 사람. 어려운 사람은 너무 어려워하고, 가까운 사람한테는 정도껏 해야 하는데 과하고. 그래서 재미있었다.

서현진의 먹는 연기에 홀딱 반했다. 먹으면서 감탄사처럼 치는 대사가 얼마나 차진지 깜짝 놀랐다. 대사는 전부 대본에 있는 거였나? 정보 전달 대사 말고 추임새는 백 퍼센트 애드리브다. 다른 애드리브는 더러 준비하기도 했는데, 먹는 장면 애드리브는 미리 준비할 수가 없더라. 다행인 건, 나도 대식가고, 먹는 걸 워낙 좋아한다. 많이 먹어본 사람이 안다. 맛있는 거 먹을 때 어떤 말이 나오는지.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 먹는 걸 많이 관찰했다. 생각보다 더 넋 놓고 먹는다. 눈에 초점이 없다. 맛있는 거 먹을 때는 다들 그렇게 먹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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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브래지어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Calvin Klein Underwear), 화이트 롱 플레어스커트 래비티(Rabbitti),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늘은 아는 스태프도 많은 화보 촬영인데도 많이 어색해했다. 드라마 스태프는 숫자도 훨씬 많을 텐데 애드리브, 그것도 맛있어서 나오는 애드리브를 친다는 게 신기하다. 화보는 내 영역이 아니니까.(웃음) 그런데 촬영 현장에 있을 때는 진짜 좋다. 연기하는 것도 좋지만, 나는 촬영장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촬영장에서 노닥거릴 때가 제일 좋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수백향 때 김민교씨랑 밤새면서 얘기한 적이 있다. 실제로 있지도 않은 얘기 찍겠다고 다 큰 어른들이 모여서 고생한다고. 그게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인 것 같다. 있지도 않은 허구의 얘기를 만들어보겠다고 다 큰 어른들이 모여서 아웅다웅하는 게 참 좋다. 다 바보들 같아서.(웃음)

미안하다. 서현진이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 줄 몰랐다. 많이들 그랬을 거다. 억울했겠다. 전혀. 나는 촬영장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사실 이번 드라마 이전에는 모니터도 거의 안 했다. 못한다. 보면 단점만 보여서 땅 파고 들어가는 스타일이라 다음 현장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없어져서. 늘 촬영장이 좋았다. 매니저 언니는 나더러 촬영장 막내 스태프였어도 좋아했을 거라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연기를 한 건 아니니까.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뮤지컬을 하게 됐다. 대본이라는 걸 읽어본 적이 없어 대본 봐주시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 선생님이 나랑 참 잘 맞았다. 독설가에 절대 잘한다는 말 안 하고. 처음 독백을 준비해 가서 읽는데 그 독백을 너처럼 서럽게 읽는 애는 처음 본다고 하시더라. 나는 그 얘기가 칭찬처럼 들렸다. 그래서 선생님한테 칭찬받으려고 4년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찾아갔다. 대학 다녔다고 생각한다 그때. 연기가 좋아서도 아니고 칭찬받으려고. 그냥 안 해본 거 한번 해보려고 했던 건데. 무용도 하고 노래도 했는데, 연기가 가장 단시간에 칭찬받은 장르였던 거다. 그래서 계속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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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매력은 뭔가? 가족들은 나한테 감정적인 결벽증이 있다고 한다. 옳고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거다.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그걸 흐트러뜨릴 수 있는 공인된 자리니까 그게 좋다. 막 할 수 있어서. 평소에는 막 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연기할 기회를 얻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룹 밀크 그만두고 연기자로 제대로 설 때까지 10년이 걸렸다. 다른 거 하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다. 부모님도 7~8년째 되니까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그런데 정작 난 네 살 때부터 무용을 해서 한 번도 인문계 쪽에 있었던 적이 없고, 다른 거 할 자신이 없는 거다. 그래서 막연하게 시간을 보냈다.

막연하게 시간을 보내기에 20대는 불안한 게 많을 때다. 시작해야 하는 나이니까. 힘들었다. 지금은 필요한 시간이었고, 그 시절에 잃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얻은 게 너무 많아서. 그런데 분명히 힘들었다. 정말 다행이다. 연기는 하고 싶다고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니까.

다른 캐릭터를 만났을 때는 어떤 연기를 보여주게 될지 궁금해졌다. 그만큼 잘했다. 다음에 못할까봐 무섭다. 늘 한 발 빼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제든 이게 아닌 다른 걸 할 수 있어.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자연 속에서 사는 걸 아주 좋아한다. 작년 말에 굉장히 아팠다. 그 와중에 미팅을 하고, 얼떨결에 등 떠밀려 시작하게 된 드라마다. 하면서 이렇게 좋기만 했던 적이 없다. 그래서 처음으로 두 발 담근 작품이다. 아프면서 이 일을 더는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연기 패턴은 아마 이전과 같을 거다. 다른 게 있다면 그건 두 발을 모두 담근 내 태도에서 온 것이다. 그동안 직업란에 배우라고 써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럼 뭐? 프리랜서. 몇 년 전까지는 학생 또는 무직. 배우가 될 수 있는지 좀 더 궁금해해봐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요즘 생각이 많겠다. 그냥 잘한다고 하니까 무섭다. 다음에는 기대치를 못 채우면 어쩌지. 하던 거 했는데 잘한다고 했고, 하던 거 했는데 못한다고 하면 어쩌나. 다음에도 좋은 사람들 만났으면 좋겠다. 그건 천운인 것 같다. 자기 작품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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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 컬러 톱 월포드(Wolford), 화이트 팬츠 서리얼 벗 나이스(Surreal but Nice), 스니커즈 아디다스 오리지널스(adidas originals).

짧은 걸 그룹 활동에 긴 공백기를 보냈으니 사람한테 실망할 일이 많았을 것 같은데. 실망하고 나서 알게 된 게 사람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그 전에는 실망할 때 제대로 못 봤다. 스태프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직함만 있는 거다. 서로. 연기자와 스태프, 가수와 스태프, 현장에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면 이렇게 풍성해질 수 있구나, 그걸 <수백향> 하면서 배웠다. 잠을 못 자서 너무 힘들 때 스태프들이 장난 한 번 걸어주면 그게 그렇게 고마웠다. 그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힘을 받았다. 현장에 어떤 모습으로 있으면 내가 행복한지 그때 알았다. 그래서 <삼총사>도 좋았고, <식샤>는 더더욱 좋았고.

욕심나는 캐릭터가 있나? 캐릭터는 없고, 장르로는 멜로에 정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멜로를 해보고 싶다.

<식샤>에도 멜로 있다. 수박 겉 핥다 끝났지 않았나.

너무 안 가긴 했다.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그니깐.(웃음)

스페인으로 여행을 간다고 들었다. <식샤>의 리얼리티 버전 같은 거다. 친구랑 여행 다니고, 맛있는 거 먹고, 다니면서 낯선 사람이 끼기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

스페인은 처음인가? 작년에 다녀왔다. 하지만 여행 마지막 코스라 그로기 상태였다. 많이 못 봤다.

여행을 좋아하나? 굉장히 좋아한다. 버킷 리스트 1, 2, 3위가 어디 가고 싶다는 거다. 일단은 아이슬란드 내륙 지방에 가보고 싶다.

아이슬란드? 왜? 거긴 가본 적 없는 땅이다. 아이슬란드 바깥쪽 일주는 했다.

오, 여행을 참 많이 다니나보다. 많이 다니진 않고, 오지를 좋아한다. 태초의 땅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일찍 결혼하긴 틀렸다. 요번 생은 망했다.(웃음) 아이슬란드 외곽도 멋졌다. 하루 9시간을 여행해도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 화각도 넓고 땅이 누가 손으로 할퀴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본 적 없는 모습이다. 산이 평범한 산 모양이 아니다. 내륙은 더 놀랍다고 하는데 차가 사륜구동이 아니어서 못 갔다. 아프리카도 가보고 싶고, 그랜드캐니언 협곡 트레킹도 해보고 싶다. 사막에서 별도 보고 싶고,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도 가야겠고, 가고 싶은 데가 너무 많다.

보편적인 20~30대 여자의 여행 취향은 아니네? 여행은 누구랑 다니나? 작년엔 매니저 언니랑.

이런, 서현진 매니저는 극한 직업이다. 하하하,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시간을 그렇게 길게 낼 수 있는 친구가 별로 없고, 여행 코드도 맞아야 하니까. 그래서 외국어를 배우고 있다. 현지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으니까. 나는 혼자보다 같이 하는 여행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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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가 꿈꾸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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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로브 에이치앤엠(H&M).

아주 오랜만에 제시카가 화보 촬영을 위해 <마리끌레르>의 카메라 앞에 섰다. 예전처럼 자신의 매니저와 스태프들과 함께 시끌벅적 등장하는 대신 혼자서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촬영이 있던 날은 그녀의 생일 전날이었고, 제시카를 ‘시카’라고 부르는 가까운 팬들이 그녀와 촬영 스태프들을 위한 컵케이크며 음료수, 향초를 한데 담아 선물로 준비해 촬영장을 찾기도 했다. 제시카는 요즘 살도 좀 붙었고, 자신의 패션 브랜드인 ‘블랑&에끌레어’의 새로운 컬렉션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다는 근황도 들려주었다. 누구나 다 아는 일련의 소란스러운 일을 겪고 난 뒤 처음 하는 인터뷰라 그런지 대답하는 데 조심스러워하는 듯했지만, 이제 많은 것을 털어내고 새로운 꿈을 꾸며 이뤄가는 눈치다. “이번 시즌에 블랑&에끌레어의 데님 라인이 새롭게 나와요. 데님이라는 게 쉽지 않은 영역이더라고요. 데님 팬츠를 디자인할 때 입는 사람 입장에서 고민했어요. 스키니 데님 팬츠를 디자인하되 아시아인에게 잘 어울리는 전체 기장과 밑위길이를 고려했죠. 블랑&에끌레어 제품은 홍콩과 중국의 레인크로퍼드 백화점에서 만날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팝업 스토어를 제안받은 상태고 아마 조만간 백화점에 매장을 오픈하게 될 것 같아요. 모든 게 신기하죠. 제가 스케치한 그림이 제품으로 완성되고, 그 제품이 매장에 진열되고 누군가 구입하는 모습을 직접 볼 때는 더 그래요. 그런데 가끔 어떤 사람들은 저 혼자 이 브랜드를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제품이 완성되려면 제 팀을 구성하는 멤버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한데 모아져야 하는데 말이에요. 대표니 CEO니 하는 수식어는 쑥스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요. 괜히 제 이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노고가 묻히는 것 같아 미안할 때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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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넥 스웨터 제임스 진스(James Jeans), 와이드 팬츠 에잇세컨즈(8seco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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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톱과 팬츠 모두 에이치앤엠(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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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릴 장식 스커트 미우미우(Miu Miu), 올인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그동안 제시카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두고 세간엔 많은 말이 오갔다. 그녀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오해인지 말을 늘어놓는 대신 조용히 패션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무대가 아닌 다른 세상을 마주했다. “사실 인터뷰하는 걸 두려워하는 편이에요. 제가 말한 것과 다르게 기사가 나갈 때도 있고, 그 때문에 오해가 생긴 적도 많아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해명할 수는 없잖아요. 큰 그림을 봤을 때, 말을 하는 것보다는 말을 아끼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때는 세상의 온갖 나쁜 말을 제가 다 듣는 것 같을 때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가 오갈 때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래도 요즘은 좀 무뎌진 것 같기도 해요. 그러려고 노력도 많이 하고요. 제가 좀 못되게 생겼잖아요. 생긴 것 때문에 더 그런가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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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프 셔츠 잇미샤(It Mich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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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원피스 에이치앤엠(H&M).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큰 힘이 되어준 건 제시카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녀의 가족이다. 얼마 전에는 동생과 엄마, 아빠 모두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데뷔하고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소녀시대로 지낼 때와 많은 게 달라졌죠. 우선 자유로워졌어요. 다른 멤버들과 함께할 때도 좋았지만, 혼자 활동하니 아무래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죠. 패션 디자인을 정식으로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도 가려고 해요. 아직 정확한 시기는 정하지 못했지만요. 일단 지금은 혼자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죠. 무슨 일이든 견디고 나면 편안한 시간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힘들었던 일을 겪고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니 점점 행복한 순간이 많아지는 걸 보면요.” 그리고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도 많아졌다. “제가 지금도 소녀시대 멤버였더라면 오늘 같은 촬영은 아마 못 했을 거예요. 아이돌 그룹은 항상 해피해야 해요. 착하고 맑고 밝아야 하죠. 그런데 제가 벌써 스물일곱이잖아요. 언제까지 마냥 해피한 소녀로만 남을 수는 없어요. 어쩌면 오늘 촬영한 제 화보 사진을 보고 누군가는 ‘소녀시대에서 나오더니 이제 벗네’ 하고 생각할지 몰라요. 그런데 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잖아요. 여자 제시카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열아홉에 데뷔해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활동하면서 이런저런 제약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제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게 되었죠. 이렇게 화보 촬영을 위해 촬영장에 혼자 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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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커트 버버리(Burberry), 브래지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 많은 오해를 풀지 못하는 답답함 같은 건 접어둔 채 그녀는 앞으로 맞게 될 시간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패션도 제대로 공부하고 싶고, 자기 목소리의 매력이 잘 묻어나는 음악도 하고 싶다는 꿈을 꾸며 말이다. “요즘 부쩍 제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몇 년 후면 서른이 된다는 생각에 이상하게 초조할 때가 있죠. 도대체 뭐가 초조한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저 자신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이제는 혼자니까 그동안 다른 멤버들이 채워주었던 제 부족한 면도 스스로 채워야 할 것 같아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도 잘 걸고, 사람들이 저를 좀 더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보면 벽 같은 게 느껴지나봐요. 전 친하지 않은 사람한테 먼저 다가가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혼자 행사나 시상식에 갈 때 많이 힘들더라고요. 제가 먼저 나서 인사라도 해야 사람들이 저한테 다가올 수 있으니까요. 제 성격의 벽을 조금씩 부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제시카는 ‘얼음공주’다. 살갑게 다가오기보다는 낯을 가리는 편이고, 돌려 말하기보다는 알아듣기 쉽도록 직선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녀에게 벽을 느꼈을 수도 있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한테 많은 오해를 샀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을 뒤로한 채 힘든 시간을 잘 버텨낸 지금, 제시카는 오로지 자신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집중하며 그동안 미뤄왔던 꿈들을 이루며, 그리고 또 다른 꿈을 꾸며 설레는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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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한 김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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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티셔츠 티 바이 알렉산더 왕(T by Alexander Wang), 브레이슬릿 잔클레(Zancle).

조선시대의 가장 나쁜 악당은 누굴까? 죄질로 보나 지명도로 보나 아무래도 연산군, 장녹수, 장희빈 이상이 없을 것 같다. 자동적으로 연인이었던 연산군과 장녹수는 조선시대 최악의 중범죄자 커플인 셈이다. 파란만장하기로도 조선시대 톱클래스인 두 사람의 삶은 숱한 창작자들을 자극해왔다. 장르를 넘나드는 많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재해석되면서, 둘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간 망종의 표본 같은 존재로 온 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장녹수의 악행이 최고 권력자의 총애에 힘입어 극단적인 신분 상승을 이룬 여자의 비뚤어진 한풀이라고 한다면, 연산군의 폭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낳는다. 시대를 거스르는 분방함과 폭발적인 에너지의 소유자였던 연산군은 당연하게도 많은 남자 배우들에게 언젠가 나를 찾아왔을 때 도저히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은 마력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리스신화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할 법한 굴절된 내면, 현대적 상식과 윤리로는 결코 있을 없는 일들을 있는 대로 저질렀던 ‘문제적 인간’ 연산군과 김강우가 만났다. 영화 <간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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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네크리스 프리카(Frica).

김강우에게서 연산군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 연산군이 뿜는다면, 김강우는 품는다. 그가 연기해온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쉽게 자신의 분노와 속내를 분출해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감정을 드러낼 때조차도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이기보다는, 마지막 한마디를 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상 살면서 자기 감정을 확 드러내고 폭발시키는 순간을 다 합해봐야 한 시간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런 게 스트레스잖아요. 참아야 하는 거. 저도 다혈질이지만 내색을 많이 하면서 살지는 않아요. 다들 그러지 않아요? 저는 그게 리얼리티라고 생각해요. 사극은 거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에요. 이번 작품 하면서 그게 되게 좋았어요.(웃음)”

절제된 내면은 그의 연기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실제 모습에서도 감지된다. 소리 내서 웃고 있는데도 정적이다. 침울한 것과는 다르다. 김강우한테는 쉽게 들뜨거나 끓지 않는 사람의 정제된 다부짐 같은 게 있다. 부패한 관리를 암살하는 무사 역할이면 또 모를까, 민규동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당신한테 연산군이 되라고 한 거냐고 물었다.

“저도 왜 나한테 이 캐릭터를 주셨는지 의아하긴 했어요. 아마 저 같은 사람이 하는 게 더 재미있다고 느끼신 것 같아요. 술자리에서 나를 택한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감독님이 술을 안 드세요.(웃음) 영화 <결혼전야>를 같이 한 홍지영 감독님이랑 지방으로 무대인사 다니면서 수다 떨다가 나중에 무슨 캐릭터 해보고 싶으냐는 말에 연산군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민규동 감독님이랑 부부시잖아요. 작품 준비하면서 그 얘기가 나왔던 모양이에요. 그게 계기가 됐나? 아무튼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그런 욕망이 있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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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팬츠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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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 셔츠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팬츠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네크리스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그와 만난 건, 첫 시사회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김강우 자신도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많은 배우들이 보여준 연산군과 김강우의 연산군이 어떻게 다를지, 우리 둘 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실제 인물이잖아요. 다들 폭군으로 알고 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봤고, 여러 배우들이 연기해왔고. 당연히 부담감을 느꼈죠. 내가 작품에 엄청난 누를 끼칠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이건 파고 팔수록 뭐가 나와요. 감자밭에서 감자 캐듯이 무궁무진하게 나오는 재미가 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완벽하게 갖지 않으면 백전백패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욕을 많이 먹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방 하나를 일주일 정도 빌려서 나오지 않고, 밥도 거기서 먹고, 빛도 차단하고 거기서 살았어요. 술도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시계도 없는 데서 미쳐가는 거죠. 작품 하면서 처음으로 전지 몇 장을 벽에 붙여서 설계도를 그렸어요. 생각나는 대로 연산군에 관해 이것저것 쓰고, 사진도 붙이고 하는 거죠. 범인 쫓듯이. 그러다 한계에 부딪혔고, 그다음부터 차라리 편해졌어요. 젠장, 걔 사는 거 본 사람 아무도 없잖아? 직접 만나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내 식대로 연산군이 된 거죠.”

작품 끝나고 여행 한 번 다녀오면 싹 리셋돼 대사 하나까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이번엔 좀 다르다. 연산군을 추적하면서 만들었던 연기 설계도는 버리지 못한 채 돌돌 말아 보관해놓았다.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게 딱 한 번만 꿈에 나타나달라고 속으로 연산군을 불렀고, 평소에는 잘 듣지도 않으면서 혼자 있을 때는 우울한 음악을, 현장에 나갈 때는 펑키한 음악을 들었다. 이랬다저랬다 미친놈처럼 구는 연산군이 되려고 그랬다. 김강우는 정말 연산군이 되고 싶었다. 김강우의 연산군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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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트 릭 오웬스(Rick Owens), 티셔츠 티 바이 알렉산더 왕(T by Alexander Wang), 나뭇잎 모티프 링 프리카(F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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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트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슈즈 처치스(Church’s).

“자기 욕망대로 살았고, 시 잘 쓰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예술가 기질이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왕이 될 사람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지. 유교 문화 잣대로는 미친 인간인 거고. 옆에서 자꾸 찌르니까 엇나가고 폭군이 됐지만, 그것도 폐위되고 신하들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 꾸며낸 부분이 많아요. 연산군의 눈빛은 포악스럽지 않아요. 장난감 던져줬을 때 아이같이 재미가 들린 눈이지. 당하는 사람은 미치는 건데, 연산군한테는 그 순간이 재밌거든요. 후반부로 갈수록 브레이크가 고장난 사람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자신이 가진 모든 감성을 하나도 절제하지 않고 다 표현하고 사는 사람.”

인터뷰가 끝나고 영화가 공개됐다. 인터넷에는 생각보다 노출 수위가 훨씬 높다는 기사부터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에로틱하다고 할 만한 장면은 없다. 살색과 핏빛으로 가득한 화면에는 섹스도 없다. 거기에는 가학적인 게임과 살아남기 위한 욕망, 공포심, 권력에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진짜 대단한 건 온몸을 던진 배우들이다. 수없이 망설이고 몰래 울었을 것 같은 지독한 노출과 설정을 감수한 여배우들도 놀랍지만, 그만큼 대단한 건 김강우다. 이 영화를 보고 성적 흥분을 느낀 관객이 있다면, 자신의 성적 취향이 건강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발가벗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연산군을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건 가장 부끄럽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희화화된 인간의 모습을 볼 때의 모멸감과 불쾌감이다. 나쁜 놈, 웃긴 놈을 택하는 것과 우스운 놈이 되는 건 많이 다를 것이다. 옷 벗고 설치는 연산군은 우습다. 조소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게 연기든 뭐든 옷을 벗는 행위가 얼마나 인간을 연약하게 만들지 생각한다면 김강우의 노출 신은 참 지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김강우는 어떻게 봤을지 궁금해졌다. 후회는 없을 것 같다. 헤어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재미없었어요. 그냥 이건 오래 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 현장 나가는 것도 좀 싫었지만, 흥미롭지 않았죠. 미치게 재미있다는 사람, 어릴 때부터 꼭 연기하고 싶었다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배우를 평생 하고 싶고, 너무 소중해요, 하는 사람들 보면 가식덩어리, 그렇게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그랬던 게 다행이에요. 어느 순간 배우를 당당하게 직업으로 인정하는 순간이 오면서 흥미가 생긴 것 같아요. 저는 연기가 좋아서, 영화가 좋아서 연기해요,가 아니라 저는 돈 벌 수 있어 해요, 거길 넘어가니까 다음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그게 몇 년 안 됐어요. 아, 이게 소중하구나, 재미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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