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즌 들꽃에서 아이디어를 확장해나갔다면 이번 시즌엔 스위스의 눈 덮인 산봉우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스위스 크슈타트 지역의 오두막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 요소들을 형상화한 상트 갈렌 엠브로이더리, 트리밍, 레이스, 잎사귀 모티프로 눈처럼 낭만적인 컬렉션을 완성했으니까. 그중 특히 돋보인 건 메인 아이템으로 선보인 소매가 퍼로 장식된 화려한 케이프 코트, 민속적인 엠브로이더리 장식이 더해지거나 양가죽으로 트리밍된 스웨터 코트 등의 아우터웨어. 또 늘 그랬듯 피날레에서는 컬렉션 컨셉트와 어울리는 깜짝 게스트가 등장해 보는 재미를 더했다. 스위스 프리부르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극단 레 바탕 드 라 로슈가 카우벨을 연주하며쇼의 대미를 장식했는데, 흥미로운 건 이들의 악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컬렉션 룩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 얼굴에 검은 선을 그은 게이샤 같은 모델들이 등장하자 관객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손이 반응할 만큼 강렬했다는 증거다. 반면 룩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전개됐다. ‘뺄셈’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색과 디테일을 비롯한 많은 것을 덜어낸 모습. 그렇다고 결코 미니멀하거나 심플한 건 아니다. 흰색과 검은색을 주조로 비대칭과 대비, 해체적 재구성이 담긴 아방가르드도 즐겼다. 게다가 흰색 페인트와 석고를 거칠게 붓칠해 독특한 질감을 더하는가 하면,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I will be back soon’이라는 메시지도 적었다. 그의 고요한 외침처럼 전성기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앤 드뮐미스터의 컬렉션. 창립자의 후임으로 브랜드를 이끄는 세바스티앙 뫼니에는 변화보다 안정을 택했다. 대신 오랜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시그니처 아이템을 각색하는 데 초점을 뒀는데, 그중에서도 끊임없이 변주된 남성적인 테일러링의 턱시도 수트가 도드라졌다. 재킷은 종아리 아래로 훌쩍 내려올 정도로 길이가 길어지거나 가뿐하게 짧아졌고, 라펠은 얇거나 넓게 혹은 비대칭으로 변형됐다. 그렇다면 팬츠는? 통이 넓은 헐렁하고 가벼운 라인과 밑단이 갈수록 좁아지는 조거 스타일, 허리를 감싸듯 여미는 형태를 오갔다. 늘 그렇듯 음울한 검은색이 대부분을 차지한 가운데 메탈릭한 원단과 벨벳, 실크, 가로등 불빛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흑백 프린트가 중간중간 끼어들며 어두운 시야를 밝혔다. 부디 다음 시즌엔 세바스티앙이 설립자의 유산을 존중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색깔을 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