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단같이 새까만 머리, 얼굴에 검은 선을 그은 게이샤 같은 모델들이 등장하자 관객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손이 반응할 만큼 강렬했다는 증거다. 반면 룩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전개됐다. ‘뺄셈’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색과 디테일을 비롯한 많은 것을 덜어낸 모습. 그렇다고 결코 미니멀하거나 심플한 건 아니다. 흰색과 검은색을 주조로 비대칭과 대비, 해체적 재구성이 담긴 아방가르드도 즐겼다. 게다가 흰색 페인트와 석고를 거칠게 붓칠해 독특한 질감을 더하는가 하면,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I will be back soon’이라는 메시지도 적었다. 그의 고요한 외침처럼 전성기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앤 드뮐미스터의 컬렉션. 창립자의 후임으로 브랜드를 이끄는 세바스티앙 뫼니에는 변화보다 안정을 택했다. 대신 오랜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시그니처 아이템을 각색하는 데 초점을 뒀는데, 그중에서도 끊임없이 변주된 남성적인 테일러링의 턱시도 수트가 도드라졌다. 재킷은 종아리 아래로 훌쩍 내려올 정도로 길이가 길어지거나 가뿐하게 짧아졌고, 라펠은 얇거나 넓게 혹은 비대칭으로 변형됐다. 그렇다면 팬츠는? 통이 넓은 헐렁하고 가벼운 라인과 밑단이 갈수록 좁아지는 조거 스타일, 허리를 감싸듯 여미는 형태를 오갔다. 늘 그렇듯 음울한 검은색이 대부분을 차지한 가운데 메탈릭한 원단과 벨벳, 실크, 가로등 불빛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흑백 프린트가 중간중간 끼어들며 어두운 시야를 밝혔다. 부디 다음 시즌엔 세바스티앙이 설립자의 유산을 존중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색깔을 낼 수 있기를.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구축한 이번 시즌 릭 오웬스의 컬렉션은 어두운 주제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불규칙적으로 얽히고설킨 드레이핑, 극적으로 과장되고 왜곡된 실루엣은 가히 충격적. 모헤어로 만들었다는 솜사탕 같은 커다란 헤어스타일의 모델들이 등장했을 땐 혹여 무대 기둥에 머리를 부딪히진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그의 골수팬이라면 이 난해한 컬렉션에서도 이번 가을과 겨울에 입고 싶은 옷들을 쏙쏙 골라내지 않았을까? 그 위시리스트엔 밑단에 이질적인 소재로 비대칭 주름과 볼륨을 더한 울 테일러드 코트나 용암이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프린트의 아우터, 부드러운 모피 튜브톱 드레스 등이 포함될 듯하다.